영국 북서부 경제 중심지인 맨체스터는 학생과 젊은 전문인력이 꾸준히 유입되는 '젊은 도시'다.

하지만 낮은 고령인구 비율 이면에는 노인 빈곤과 사회적 고립이 자리한다. 맨체스터 노인의 36%가 저소득층이고, 59%는 생활 여건이 가장 열악한 지역에 거주한다.

맨체스터시는 2003년 고령친화 프로그램을 시작한 데 이어 2009년 '나이 들기 좋은 도시(Great Place to Grow Older)' 전략을 발표했다. 2010년에는 영국 도시 최초로 세계보건기구(WHO) 고령친화도시 국제네트워크에 가입했다.

특히 문화예술을 통해 노인을 관객이나 복지 수혜자가 아닌 문화활동의 주체로 세웠다.

본보는 이를 현장에서 구현하는 휘트워스 갤러리(The Whitworth Art Gallery)를 찾아 예술이 노인의 고립을 끊고 새로운 관계와 역할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봤다.

◇감상 넘어 창작으로

1889년 설립된 휘트워스는 예술을 사회 변화의 촉매제로 여기는 시민 미술관이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성장한 맨체스터에서 시민 교육과 사회적 교류의 장을 맡아왔으며, 현재는 맨체스터대학교에 소속돼 있다.

휘트워스는 지난 10여년 동안 '에이지 프렌들리 휘트워스(Age Friendly Whitworth)'라는 이름으로 50세 이상 시민을 위한 예술·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노인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히 미술관으로 초대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노인이 직접 만들고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참여형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대표 사업은 무료 예술·공예 프로그램인 '핸드메이드(Handmade)'다. 매주 금요일 오후 전문 예술가의 안내에 따라 판화와 콜라주, 실크 페인팅, 펠트 공예 등을 체험한다. 미술관 소장품과 전시 작품을 창작 소재로 활용해 작품 감상과 토론, 창작 활동이 하나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핸드메이드의 성과는 완성된 작품에만 있지 않다. 참여자들은 매주 같은 공간에서 만나 서로의 작품과 삶을 이야기한다. 예술 활동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고, 미술관을 낯선 전시공간이 아닌 자신이 소속된 생활공간으로 받아들인다. 미술관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던 노인이 전시에 관심을 갖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노인의 경험이 미술관의 콘텐츠

휘트워스의 고령친화 사업은 노인의 신체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세분화돼 있다. '크리에이티브 메노포즈(Creative Menopause)'는 폐경과 갱년기를 개인이 홀로 감내해야 하는 의료적 문제로만 보지 않고 예술을 통해 경험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은 요가와 명상, 창작 글쓰기, 점토 작업, 자수와 배너 제작 등에 참여하며 자신의 몸과 감정 변화를 이야기한다.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지원단체인 조지 하우스 트러스트와는 HIV 감염 상태로 살아가는 50세 이상 시민을 위한 전시 해설과 미술관 투어, 창작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사회적 낙인이나 건강 문제로 문화시설 방문이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새로운 활동과 관계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휘트워스는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다른 기관과 공유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노인 남성의 문화 참여를 위한 핸드북'과 '치매 환자와 함께하는 문화 참여 활동 핸드북', 52가지 예술활동 자료 등을 발간했다. 미술관 방문이 어려운 치매 환자와 돌봄 가족을 위해서는 디지털 애플리케이션 '아트 센스(Art Sense)'도 개발했다.

결국 휘트워스의 고령친화 사업을 관통하는 원칙은 '노인을 위해서'에 머물지 않고 '노인과 함께' 문화활동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노인은 더 이상 복지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나 미술관의 수동적인 관객이 아니다. 축적된 경험을 예술로 표현하고 프로그램을 설계하며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문화적 주체였다.

"지역 문화기관·노인주민 고령친화사업 함께 고민 주도적인 참여 이끌어내" 인터뷰 / 클레어 카웰(휘트워스 고령친화 프로그램 기획자) -휘트워스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했고, 휘트워스에서는 10년째 근무하고 있다. 현재 일주일에 3일 근무한다. 노인과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닮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휘트워스 정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

"휘트워스는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정신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정원에서 머물며 안정과 회복의 시간을 갖는다. 미술관의 예술활동과 자연환경이 함께 사람들의 웰빙을 돕는다."

-고령친화 사업은 어떤 방식으로 추진되나.

"맨체스터에는 30여개 문화기관과 노인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고령친화 문화실무그룹이 있다. 노인을 문화복지의 수혜자로만 보지 않고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며 다른 주민의 참여를 끌어내는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두 달에 한 번가량 만나 현안을 논의하고 3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 올해는 'Age Friendly Culture: Doing Things Differently'라는 새로운 3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도 사람들이 창조적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다. 나는 나이 때문에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이로 인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영국 맨체스터=석현주기자 hyunju021@ 사진=송희영기자 nnshy@ks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